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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 신안 보물선의 기적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5-01-02 조회수 : 8279
수중 유물 발굴 40주년 기념 특집ㅣ바다 속 문화유산 - 신안 보물선의 기적

신안 앞바다에서 보물선 발견

신안선 선체인양을 위한 관계자 현장설명(위) 선상에서 인양유물의 분류 정리(아래)
우리 민족은 선사시대부터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어로생활과 문화교류의 전통을 쌓아왔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에는 청동기 시대에 이미 배를 타고 고래를 사냥했던 모습이 남아 있다. 또한, 9세기말에는 장보고가 동아시아의 해상 교역을 주도하여 우리 민족의 해상경영 능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바다는 삶의 터전으로 외부 적으로 부터 우리나라를 보호하는 한편 바닷길을 통해서 문화의 상호 교류 또한 이루어졌다.
신안선 출항일자(지치삼년) 및 도착지(동복사)를 알 수 있는 화물표
이런 우리 조상들의 해양 활동 흔적들은 문헌 기록에 남아 있으며, 해양활동 과정에서 난파된 선박이나 유물들이 바다 속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71년 이후 수중에서 유물을 발견한 지점은 274곳이 넘으며, 신고 유물은 5,700여 점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 수중발굴은 1975년 5월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앞바다에서 고기잡이 배의 그물에 도자기가 올라오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발굴조사에 앞서 유물은 불법도굴이라는 큰 아픔을 겪었다. 당시 바다에 보물선이 매몰되었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예로부터 가끔 바다에서 그릇이 그물에 올라오면 “옛날에 사람을 수장(水葬)하면서 사용했던 그릇이다”라는 속설이 있었다. 때문에 죽은 자의 원귀가 끼어 있다고 생각하여 가까이 두려고도 하지 않았고, 조개류가 붙어 있어 별 관심도 없었다.

신안 유물의 경우도 처음에 발견한 어부는 갯벌과 굴 껍데기가 엉겨 붙어 볼품없는 그릇을 집에 보관하고 깨진 것은 개밥그릇으로나 사용되었다. 고급 청자가 집에 보관된 것을 유심히 본 친척이 관심을 갖고 그 동안의 상황을 파악하여 신고하였다. 하지만, 당시 관련기관의 담당자는 바다에서 이런 최고급의 도자기가 인양될 수가 없다며 보상금이나 타려는 신고가 아닌가라는 시각에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찌 알았는지 도굴꾼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도자기를 불법 인양하여 시중의 골동품 가게에 팔거나 외국으로 밀매하기 시작하였다. 경찰이 도굴꾼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값을 따질 수 없는 도자기 수 백점이 확인되었고, 이를 통해 본격적인 수중발굴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우리에게 ‘신안 보물선’으로 더 많이 알려진 신안선 발굴 작업은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한국 수중문화재 발굴이야기

신안선에 실린 최고급 중국 도자기초창기에는 수중발굴에 대한 경험과 전문인력 부족으로 해군 잠수사들의 협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속된 수중발굴의 경험과 노하우가 축적되면서 2002년 군산 비안도 발굴 이후부터는 국립해양유물전시관(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자체 인력만으로도 수중발굴조사단이 꾸려질 수 있었고, 드디어 2007년 3월 5일은 우리나라에서 수중발굴을 전담하는 정부조직인 수중발굴과가 직제상으로 처음 만들어졌다. 1976년 신안수중발굴 이후 30년이 지나서야 정식직제로 탄생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수중문화재에 대한 국가차원에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14세기 동아시아 교역사를 밝혀준 신안선

 
선형 복원된 신안선 (최대길이 34m, 너비 11m, 적재중량 약 200톤)신안선 발굴은 1976년부터 1984년까지 9년 동안 10차례의 대규모 발굴조사를 통해 완료되었다.
하지만 조류가 빨라 시야가 제로(0)에 가까운 신안 증도 해역에서 유물을 확인하고 조사하기에는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해군의 정예잠수사들도 도굴범의 말만 듣고 주변 해역을 조사했으나, 도저히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목포교도소에 수감중인 도굴범을 데려다 매몰위치를 확인하고 본격적인 수중발굴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수중조사는 해군 심해잠수사(SSU)가 담당하고, 발굴담당자들은 발굴 유물을 세척하고 정리하여 보고서를 작성하는 장기 발굴조사였다.

발굴조사 결과 유물은 배를 포함하여 중국 송・원대 도자기류 2만여 점, 동전 28톤, 고급 목재인 자단목(紫檀木) 1,000여 본(本)이 인양되었다. 또한, 경원로[慶元路, 현재 중국 절강성 영파(寧波)]가 새겨진 저울추는 배의 출항지를 밝히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지치삼년(至治參年, 元의 연호, 서기 1323년) 연호와 일본인 성명, 일본 사찰명이 적힌 물표[木牌]가 발견됨으로써 출항연대와 목적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발굴유물의 연구결과를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면 신안선은 1323년 중국 영파항에서 일본 큐슈 하카다(博多)항으로 항해하던 중 우리나라 해안에 침몰했음이 밝혀졌다. 또한 신안발굴은 그동안 사료 등을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었던 중세의 조선(造船) 기술과 선박의 실체를 밝혀주었고, 중세 동아시아 해상교역로의 실상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 글 문환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과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