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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 거제포로수용소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5-06-09 조회수 : 6715
거제포로수용소

거제포로수용소는 수용자들의 ‘낙원’
1951년 초부터 시설공사가 시작됐고 부산에 있던 포로를 이곳으로 이감하는 ‘알바니작전’이 개시됐다. 그해 2월 부산수용소에 있던 포로 5만여 명이 우선 거제도로 거처를 옮겼고 한 달 후, 5만여 명이 추가로 이송됐다. 같은 기간 원주, 영등포, 수원, 제천, 대전, 하양에 있는 포로수집소에서는 계속해서 부산으로 포로를 보냈고 이 인원들은 다시 거제도로 향했다. 하루 2,000여 명의 포로들이 거제도로 유입됐다. 6월 이송 작업이 마무리될 즈음 인민군 포로 15만 명, 중국군 포로 2만여 명 등 최대 17만 3,000명의 포로를 수용했다. 그중에는 300여 명의 여성 포로도 있었다.

1952년 UN군사령부의 포로 분리, 분산 작전으로 수용 인원들이 다시 전국으로 흩어지기까지 1년 남짓 동안 거제도는 국내 최대 포로수용소였다. 당시 UN군이 관할하던 거제포로수용소는 1949년 체결된 제네바협약에 따라 엄격히 관리됐다. 제네바협약은 전쟁 포로와 부상자 등 전투에 가담할 수 없는 사람들과 민간인을 보호하는 교전규칙을 담고 있다. 수용소 내 질서는 포로 자치제에 맡겨졌고 수용자 관리실태는 국제적십자사 대표들에 의해 수시로 점검됐다.
덕분에 UN군수용소는 ‘낙원’으로 불렸다. 수용자들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따뜻한 세끼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 그리고 깨끗한 의복을 제공받았다. 하루 10개비의 담배도 지급됐다. 매월 20~30편의 영화도 상영됐다. 일반 병원을 비롯해 치과 전문 병원도 개설돼 수준 높은 의료혜택을 봤다. 반면 하는 일은 형식적인 작업이 전부였다. 간혹, 한국군 경비병과 북한 포로 간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경비병보다 포로에 대한 대우가 더 좋다는 불만 때문이었다.

포로막사

낙원에서 이념 전쟁터로
그러나 너무 많은 수용자가 몰리면서 관리능력도 한계에 부딪혔다. 처음 몇 개월은 비교적 평온했지만 이내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다툼을 넘어 소요나 폭동사태로 번지는 사례도 잦아졌다. 그러나 포로 인권에만 초점이 맞춰진 제네바협약에는 포로들의 집단행동을 저지·규제할 규정이 전무했다. 게다가 소수의 관리 인력으로 다수의 포로들을 당해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포로들 역시 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포로들이 조직을 만들어 시위를 벌이고 경비병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해도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1951년 6월 사고가 터졌다. 북한군 장교 포로들이 있던 제7구역의 제72소구역이 진원지가 됐다. 위생검사와 급식에 불만은 품은 포로들이 식사를 거부하면서 소요를 일으켰다. 노래를 부르고 깡통을 두드리고 돌을 던지며 날뛰었다. 장교 포로인 그들은 ‘모든 구역의 통제권’을 요구했다. 식사를 치우기 위해 수용소 안으로 들어갔던 미군 장교와 사병 여럿이 이들이 던진 돌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들은 이에 아랑곳 않고 함성을 지르며 출입문을 향해 돌진했다. 참다못한 경비병이 위협사격을 하자 겨우 사그라들었지만 이 과정에서 포로 세 명이 죽고 여덟 명이 중상을 입었다.


관물정리하는 포로(수용동) / 포로들을 위한 치과병원


하지만 이는 서곡에 불과했다. 한 달 뒤, 휴전회담이 열렸다. 수용소 분위기는 이상하게 끓어올랐다. 조만간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포로송환이 현실적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포로들 간에도 친공과 반공으로 편이 갈렸고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친공 세력은 수용소 인근의 민간인이나 피난민을 매수해 북한과 연락을 취하고 전언이나 투석, 시호통신 등으로 정보를 교류하며 암암리에 조직을 키웠다. 대수롭지 않은 일도 시빗거리나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 저항의 빌미로 만들었다. 친공과 반공 사이엔 ‘전쟁’이라고 할 정도의 무력충돌이 잇따랐다. 집단구타는 기본, 심지어 살인사건도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도 수용소 관리부는 손을 놨다. 사법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관리 부재 속에 1951년 12월 18일, 양측이 정면충돌했다. 투석전으로 번졌고 열네 명의 포로가 사망했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됐다.
특히 친공 세력은 휴전 시 북한 또는 중국으로 송환될 인원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유혈사태를 빚기도 했다.
1952년 2월 18일 미 제25사단 제27연대 제3대대 병력이 송환심사를 위해 제62구역에 진입하자 포로들이 미리 준비한 몽둥이, 도끼, 칼, 삽, 곡괭이, 죽창 등을 휘두르며 저항했다.
1,000명 이상의 포로들이 한꺼번에 경비병에 달려들었고 발포 명령이 떨어졌다. 폭동은 진압됐지만 포로 중 55명이 즉사했고 162명이 중상을 당했다. 미군 측도 1명이 죽고 38명이 부상을 입었다.
1952년 5월 7일에는 친공 포로들이 수용소장 프랜시스 돗드(Francis Dodd) 준장을 납치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당시 미군 측은 무력진압을 계획했지만 돗드 준장을 볼모로 잡은 포로들의 협박에 굴복, 요구사항을 수락한다는 굴욕적인 각서를 써줘야 했다. 훗날 ‘콜슨문서’로 불리게 된 이 각서는 휴전회담장에서 공산군 측이 UN군을 공격하는 빌미가 됐다.

포로수용소 유적 공원 전경

민족역사교육의 장으로
한국전쟁 휴전협정 직후인 1953년 8월 5일, 남과 북이 수용 중이던 포로들의 송환이 시작됐다.
이후 33일 만인 9월 6일 송환작업이 완료됐다. 이후 냉전시대 이념 갈등의 축소판이었던 거제
포로수용소도 폐쇄됐다.
잔존 건물의 일부만 남아 있던 포로수용소 유적은 한국전쟁의 참상을 말해주는 민족역사교육
장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1983년 12월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됐다.
거제시는 1995년부터 유적 공원화사업을 추진했다. 1998년 첫 삽을 떠, 1999년 10월 유적관을
우선 개관했다. 이어 2002년 11월 총 면적 6만 4,224㎡ 규모의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 공원’
을 완성했다. 공원은 실물유적을 볼 수 있는 유적지와 포로들의 생활상, 막사, 사진, 의복 등 생
생한 자료와 기록물들로 채워졌다. 특히 학생들의 통일, 안보의식 함양 및 나라사랑의식을 고취
시키는 교육장으로 개관 이후 한 해 평균 100만 명이 넘는 방문객이 공원을 찾고 있다.
 
- 글. 김민진 (부산일보 기자) 사진. 거제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