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2016.10] 벌교 구석구석이 소설<태백산맥>무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6-10-05 조회수 : 3791




벌교는 소설을
소설은 벌교를 만들어
벌교는 바다를 향해 포구가 길게 늘어서 있다. 벌교역에서 포구에 놓인 가장 아래쪽 다리인 제2부용교를 건너면 옛 벌교상고였던 벌교제일고교가 나온다. 교차로를 지나자마자 산 쪽 들머리로 올라서면 왼쪽이 태백산맥문학관이다. 지난 9월 3일 이곳을 찾았더니, 현대자동차 직원들이 둘러보고 있었다.
이어 광주에서 찾아온 10여 명의 중년들이 안내자로부터 소설 속 ‘꼬막’ 얘기를 듣고 있었다. 유리 외벽에 세워진 18미터높이의유리탑은 대각선 방향으로 하늘을 향하고 있었고, 옹벽에 돌로 새긴 벽화는 역사의 저류에 흐르는 맥脈을 보여주는 듯했다. 문학관에서는 작가의 취재 기록과 1만 6500매에 달하는 육필 원고, 작가의 삶과 문학세계를 보여주는 각종 기록물과 저작, 소설 태백산맥을 필사한 원고들, 이 소설을 둘러싼 논란을 기록한 자료들이 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문학관 바로 위는 소화의 집. 그리고 육중한 한옥으로 된 현부자네 집이 포구의 들녘을 내려다고 보고 있었다.
장소를 옮겨 벌교읍내 중심가. 벌교초등학교 앞을 지나는 길은 일제강점기부터 형성돼온 옛 중심가로다. 벌교 사람들은 아예 ‘소설 태백산맥 문학로’라고 이름 짓고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초등학교 옆 일본식 2층 목조건물은 소설 속 남도여관. 낡아 먼지가 쌓이고 삐그덕 소리가 나던 곳이 이젠 말끔하게 단장되었다. 소설의 공간을 답사하는 이들에겐 필수 코스. 이날도 문학모임인 듯한 10여 명이 여관 1층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소설 태백산맥을 얘기하고 있었다. 이 여관뿐아니라 진트재, 현부자네 집, 소화의 집, 회정리교회, 벌교상고, 중도방죽, 철다리, 소화다리부용교, 횡갯다리홍교, 장터거리,벌교역, 용연사, 금융조합, 벌교읍사무소, 자애병원, 김범우의 집 등 소설의 무대는 벌교 구석구석 널려 있었다. 벌교 전역이 소설의 무대였다. 벌교읍 음식점들은 ‘꼬막’이 아니면 안되는 듯 저마다 꼬막을 간판에 달고 있었다. 소설을 더듬어 찾아오는 이들에겐 간판만 보아도 친숙함을 주는 듯했다.
이렇듯 벌교 어딜 가나 이젠 소설 태백산맥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이곳 벌교는 태백산맥을 배태시킨 곳. 1983년<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한 지 7년 만인 1989년 소설 태백산맥은 10권으로 묶여 완간되었다. 언젠가부터는 소설 태백산맥이 벌교를 재탄생시키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벌교의 ‘무서운 폭발력’
일찌감치 작가가 감지
작가 조정래는 소설 태백산맥에서 벌교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벌교는 한마디로 일인日人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 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는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이 작은 갯가 마을이 어떻게 소설의 중심 공간이 되었을까.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는 “작가 조정래가 설명하고 있는 벌교는 어찌 보면 평범한 소읍에 지나지않는다”며 “그러나 이 평범함 속에 배태되어 있는 무서운 폭발력을 작가만이 감지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권영민 교수의 <태백산맥 다시 읽기> 아마도 그 ‘무서운 폭발력’이 열쇠인 듯하다.
벌교를 한눈에 보려면 부용산에 올라야 제격이다. 벌교포구에서 중도방죽, 철길, 소화다리, 홍교를 따라 양편으로 들어서 있고, 위쪽으로는 낙안들녘이 눈에 들어온다. 벌교라는 지역을 역사적으로 따라가 보자. 바닷물이 드나드는 하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갯마을로 낙안들녘 아래에 붙어 있다. 벌교라는 행정구역상의 이름이 처음 쓰인 것은 1914년. 일제가 식민통치의 기본 토대를 마련하는 차원에서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재차 시도한 때였다. 벌교를 전남지역 동부와 남부의 중심 포구로 개발, 수탈 목적으로 내륙과 해안지역의 물자를 집중시켜 유출할 수 있는 최적지로 삼았다.
자연스런 모습이던 벌교천은 일본 사람들에 의해 1929년 일직선으로 정비되었다. 일직선 안쪽 갯벌 2만 6000평이 택지로 만들어졌다. 이 개발지에 신식 시가지가 들어섰다. 식산은행 벌교지점, 남선무역, 벌교수산, 벌교금융조합, 운수조합,전기회사 등이 문을 열었다. 4, 9일에 여는 벌교장은 3000여 명이 모여 전남 3대 시장으로 꼽힐 정도로 성장했다. 1920년대부터는 일인들이 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1930년 벌교는 광주와 순천 간 철도가 통과하였고, 물류유통과 상업 발달로 신흥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에 따라 벌교면은 1937년 읍으로 승격했다. 보성군의 중심지인 보성면보다 4년이나빨랐다. 벌교는 일제강점기 일본 식민세력이 집중 개발하면서 수탈기지로 기능했다. 급속도로 성장한 이 도시는 식민지배의 모순이 작용하고 있었다. 지배와 저항, 협력의 삼중주三重奏가 펼쳐졌다. 벌교의 공간에는 이와 함께 ‘민족 갈등’이 깊숙이 자리 잡았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계속되면서 민족 구성원 내부의 갈등은 점차 격화되었다.





벌교는 민족과 계급의 갈등지
여순사건으로 벌교 사회 폭발
소설은 1948년 여순사건으로 벌교에서 활약하던 주동자들이 인근 조계산으로 퇴각하는 10월 24일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소설에서 전개되는 민족 갈등은 일제강점기에 씨가 뿌려지고 격화돼온 배경을 전제로 하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계급갈등’ 역시 심각하게 드러내고 있다. 소작농 출신과 지주, 중간지대에 지식인이 포진하고 있었다. 소설 속 일본 나카지마는 벌교에서 갯벌에 이르는 20리 이상의 둑을 막아 대단위간척지를 개발하였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때 간척이 이뤄졌다. 벌교에서 지주와 소작인 간의 대립과 갈등은 어느 곳 못지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930년 보성군에는 50정보 이상의 토지를 가진 26명의 지주가 있었다. 그중 9명이 벌교읍이었다. 1949년 농지개혁 당시 20정보 이상의 보성군 내 지주는 7명. 이 중 벌교의 지주가 4명이었다. 벌교읍이 두드러진것은 벌교포구의 간척지와 낙안들녘 농지 등과 관련이 있는것으로 보인다. 지주들은 60%대의 농지를 소유했고, 소작농들은 일제강점기 수확량의 60%대를 소작료로 내야 했다. 일제와 가까울 수밖에 없는 지주계급과 달리 힘없는 소작농민들은 식민지의 질곡 속에서 신음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갈등이 펼쳐지는 가운데 여순사건이 발생했다. 14연대와 토착좌익은 여수, 순천, 보성, 광양을 거의 장악했다. 구례, 곡성, 남원, 하동은 일부를 장악했다. 14연대가 벌교로 들어온 2~3일 사이에 100여 명의 우익인사들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상황은 진압군이 들어온 이후에도소화다리에서 재연되었다. 단지 이번에는 고발자의 성향이 바뀌었을 뿐이다. 좌익 치하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반란군에 부역했던 사람들을 쥐 잡듯이 찾아내 ‘피의 고발극’이 재연된다. 이러한 보복의 연쇄극은 ‘손가락총’으로 불릴 정도였다.
반란군이나 진압군이나 그들의 색출 대상을 협조자에게 지적케 하고 그 손가락 끝에 지적되기만 하면 다 총살시켰기 때문이라고 군사郡史는 적고 있다. 특히 좌익세가 강했던 곳이 보성군 율어면과 문덕면이었다. 조계산을 끼고 있어 활동하기에도 유리했다. 벌교와 가까운 율어면의 경우 소작인이 많아 좌익 분위기가 강했다. 좌익 활동가들이 많아 ‘보성의 모스크바’로 불리기도 했다. 여순사건 2년 뒤에는 전쟁이 휩쓸었다.


벌교와 작가의 어린 시절
소설, 역사를 되돌아보게 해
민족과 계급 갈등이라는 한국사의 현상은 보편적이었다. ‘평범한 소읍’이란 뜻에는 이런 의미도 담았을 것이다. 그런 보편성에 벌교가 갖고 있는 특수성이 부가되었으리라. 일제강점기의 민족 갈등이 집약적으로 축적되었을 뿐 아니라, 이념과 민족 갈등이 최정점으로 치달은 한국전쟁 이전의 여순사건을 통해서 먼저 폭발한 것이 지역적 특수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가 조정래의 어린 시절, 그는 소설 속 역사의 시간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가 태어난 곳이 벌교와 지척인 조계산 자락 선암사. 아버지가 대처승이었다. 여순사건을 순천에서 겪었고, 순천남국민학교를 다녔다. 1953년 작은아버지들이 살고 있던 벌교로 이사했다. 1956년 벌교를 벗어나 광주로 가서 서중학교에 들어갔다. 1959년 아버지가 교사로 근무하던 서울 보성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1950년 논산에서 한국전쟁을 맞은 때를 제외하곤 전남 동부에서 보냈다. 그를 포함한 가족과 이웃, 동네와 지역 사람들이 겪었던 체험과 견문, 전언이 문학적 토양이 되었을 것이다. 소설 속 200여 명의 인물을 통해 그가 말하는 ‘역사적 진실’을 그려냈을 것이다.
소설 속 시간은 여순사건에서 전쟁을 거쳐 휴전협정에 이르기까지 5년 동안이다. 이 시간 동안 민족 내부의 갈등상,그 과정에서 참혹하게 벌어진 살육과 보복 행위가 처절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가 인식하는 역사는 소설 속 시간을 훨씬거슬러 올라가 일제강점기, 그리고 19세기 말까지도 토대로 삼고 있다. 작가는 “내가 빨치산들을 옹호하거나 그들의 이념에 동조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네들의 인간적인 욕구와 삶에 대한 진정성을 주목했다”며 “역사적 진실을 외면해온 정치적인 폭력에 대해 비판했을 뿐, 어떤 사상이나 이념적 판단을 내세우지 않았다”고 한 바 있다. 시비와 논란은 많았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 역사 그 자체는 아니다. 사실과 허구로 재구축한 것이 소설이기 때문이다. 통일의 시대로 나아가야 하는 민족적 과제를 안고 있는 지금, 작가가 말하는 ‘분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상황과 역사를 되돌아보게 한다.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또 우리는 미래를 전망한다. 역사와 미래의 화두를 짊어지고, 소설 속 공간을 배회하고자 한다면 벌교를 찾지 않을 수 없으리라. 오늘도 벌교는 그러한 손들을 맞고 있다.


- 글. 권경안. 조선일보 호남취재본부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