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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 인간문화재의 삶과 예술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7-04-18 조회수 : 986



 







가야금산조 예능보유자 이영희 선생
이영희는 국악계의 대표적 공로자이자 지도자로서 80세를 바라보는 원로다.
전라북도 군산에서 출생한 이영희는 군산중학교 시절 김향초로부터 승무와 바라춤을 배우면서 처음 가야금 소리를 들었고, 생애의 전공음악으로 굳게 인연을 맺었다. 또한 양반의 후예인 이덕일로부터 양금과 단소를 배우고, 처음으로 줄풍류를 접한 것이 음악의 세계관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당시 여성국극의 반주자로 활동하던 이운조로부터 가야금산조를
배우게 됐다.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에 진학한 것은 그때만 해도 국악과가 없었던 까닭이다. 그녀는 가야금이 너무 배우고 싶어 덕성여자대학의 장사훈 교수1916~1991를 찾아갔다. 장 교수는 그녀에게 김윤덕국악연구소를 소개해 주었다. 김윤덕은 일찍이 양금풍류·가야금정악·거문고정악· 가야금산조·거문고산조 등을 차례로 발전시킨 국악계의 거인이었다. 그녀는 선생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우는 한편 연구소를 자주 찾던 아쟁산조의 창시자 한일섭1929~1973에게서 아쟁을 배웠다. 1961년 대학 졸업을 1년 앞두고 KBS의 전신인 중앙방송국이 주최한 국악콩쿠르에서 아쟁으로 1등을 차지했다. 국내 유일의 국악콩쿠르였다.

이 콩쿠르는 이영희의 인생을 일시에 바꾸어 놓았다. 심사위원이었던 박헌봉 선생1906~1977은 서울국악예술학교의 초대 교장이었는데, 그녀의 실력을 한눈에 알아보고 강사로 초빙해 주었다. 1960년에 개교한 국악예교는 당시 국악계의 최고 명인들이 강사진을 이루었는데, 이영희는 영광스럽게도 내로라하는 분들 사이에서 가르치며 배우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국어·가야금·아쟁을 가르쳤고, 학생 가운데는 오늘날 명인이 된 김영재·박범훈·최태현·김수란 등이 재학하고 있었다. 한편 그녀는 박녹주 선생에게 단가, 김윤덕 선생에게 줄풍류 등을 배우며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배우는 강사 선생님’으로 칭송을 받았다. 학교 강의 이외에 연주가로서도 열심히 활동했다. 1968년의 멕시코올림픽, 1972년의 뮌헨올림픽 등에 문화예술공연단원으로 파견된 것도 이러한 활동이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면 할수록 부족함을 깨달았다.

1980년대에 학교 강의를 그만두고, 다시 배우는 데 전념했다. 김윤덕 이외에 김춘지·성금연·김죽파 등 가야금만 일곱 분이 넘는 선생님을 모셨다. 김윤덕이 작고한 지 13년 만에 가야금산조의 보유자로 지정된 것은 이렇게 줄기차게 수련한 연주실력과 사회적 공적의 결과였다.
김윤덕은 2003년부터 해외입양아를 위한 국악교육을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 교육이 실효를 거두고 있는 사실은 여러 가지 반응으로 입증되고 있지만, 아울러 이영희 음악정신의 살아 있는 실천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발탈재담 예능보유자 조영숙 선생
정부는 이동안1906~1995이 보유한 발탈의 소중한 가치를 전승하기 위해 1983년 6월 이것을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했다. 현재는 박해일1923~2007의 예능을 계승한 박정임1939~, 이동안의 예능을 계승한 조영숙1934~ 두 보유자가 전승활동의 지도자다. 조영숙은 발탈재담의 독보적 존재다. 그녀의 부친은 화순군 능주면화계동에서 출생한 판소리꾼 조몽실1902~1953이다.

그녀는 용동공립보통학교와 제2여자중학교를 거쳐 광복 후인 13세에 원산사범전문학교구 루시여고 자리 본과에 입학했다. 2학년을 수료한 1950년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학교 기숙사에서 전쟁을 만난 그녀는 살 길이 막막했다. 고종사촌 언니 해숙을 찾아 단신으로 평양을 향해 떠났다. 언니는 평양의 고전음악연구소에서 반주단원양금 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동강 철교가 폭격으로 무너졌다. 1951년 1·4후퇴 때 그녀는 온갖 고초를 겪으며 홀로 광주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그녀는 오랜 세월 사진으로만 보았던 방랑하는 소리꾼 아버지, 전쟁 전에 월남한 어머니를 반갑게 상면했다. 광주에서 이종사촌 언니 집에 살 때 창극 <만리장성>을 보았다. 난생처음 본 창극에 자극을 받아 임춘앵1924~1975이 주도한 여성국극동지사임춘앵과 그 일행에 입단했다. 이 동지사는 1948년에 결성된 여성국악동호회회장 박녹주 출신의 임춘앵·임유앵·김경애·박초월 등이 주축이 돼 1951년 가을에 결성했다.
극단 가입 후 그녀는 10년간 여러 작품에 출연하며 연기자로서 착실하게 성숙했고, 임춘앵의 대역을 맡을 정도로 유능한 연기자가 됐다. 입단 초기에 동지사에서 때마침 창지도를 맡았던 부친에게 소리 공부를 시작했다.
달가워하지 않은 모친의 뜻을 어기고 10개월 정도 단가와 심청전추월 만정 대목 등을 익혔다. 이 시기에 그녀는 임춘앵으로부터 판소리와 창법이 다른 연극소리·춤·외북치기·무대연출 등을 배웠다. 강장원으로부터는 <수궁가> 일부, 장영찬에게서는 흥보가·적벽가·춘향가·심청가 등을 익혔다. 그녀는 익살 전담 배우당시 일본식으로 ‘삼마이’ 배우로서 특히 전통적인 코믹 역할 탐구에 매진했고, 연기가 뛰어나다는 평판을 얻었다. 판소리의 분석을 통해 그녀는 스스로 익살 연기를 개발하는 능력을 길렀다. <공주궁의 비밀> <선화공주> <바우와 진주목걸이> <백호와 여장부>상동 등 숱한 작품에 출연했다. 이동안과의 인연은 19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계림극장에서 여성국극을 공연하는 날, 그녀의 무대를 지켜본 이옹이 분장실을 찾아왔다.
이옹은 자신과 부친 조몽실과의 친분을 털어놓으며 자신의 종로5가 무용학원으로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런 만남이 계기가 돼 잠시 이옹에게 고전무용을 배운 적이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흩어졌다. 1983년 6월 어느 날, 그녀는 TV에서 우연히 이옹의 인터뷰 방송을 보게 됐고, 방송 도중에 ‘조영숙’의 이름을 말하면서 “이 방송을 보고 있으면 자신을 찾아 달라”는 뜻밖의 초청을 받았다. 종묘곁에 있던 이옹의 학원을 찾았다. 이런 재회가 발탈과 인연을 맺게 된 직접적 동기다. 발탈은 탈춤이 본질이 아니라 재담이 생명이라는 점에서 일반 탈춤과
구별된다. 발탈재담은 광대재담극의 오랜 역사를 통해 성숙되고 발달돼 온재담정신과 기술을 계승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발탈을 기능적으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재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런 점에서 조영숙의 예능은 독보적이다.
앞서 밝힌 대로 그의 재담은 학교 시절의 연극활동, 판소리의 수련, 여성국극에서의 배우생활이 바탕이 됐고, 이동안의 재담을 계승함으로써 축적된 예능이다. 그녀야말로 우리의 마지막 재담꾼이다.



- 글. 서연호. 고려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