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2017. 4] “필묵으로 형용할 수 없어 고사姑舍한다”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7-04-18 조회수 : 3045










 




“화려하고 아름다운 경상景象과 장려한 배치는 필묵으로 형용할 수 없어 고사姑舍한다.” 유길준이 파리의 왕궁 팔레 루와얄Palais Royal에 경탄하면서 한 말이다. 유길준은 튈르리 궁Palaisdes Tuileries의 건축 양식, 조각, 회화의 장엄하고 화미華美한 경상景象에도 압도돼 “글로 다 쓸 수 없고, 말로 다 얘기할 수 없다. 어렴풋한 모사와 모호한 논평은 그 화미한 제도와 웅장한 규모를 오히려 줄어들게 하니 여기서는 잠시 그만둔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화미함의 극치를 이루는 서양 건축물을 말과 글로 표현해도 ‘허영’虛影에 불과하며 ‘진경’眞景을 해칠 뿐이니 형용하는 것을 잠시 그만둔다는 말이다. 장엄함과 화려함에 압도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유길준은 워싱턴, 필라델피아, 런던, 베를린, 함부르크 등 미국과 유럽의 주요 도시들의 화미한 풍경도 상세히 묘사하고있다. 곳곳에 넓은 거리와 깨끗한 주택에 관한 서술이 보인다.
도처에서 궁전이나 기념비, 박람회장 등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을 보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도회지마다 산재한 넓고 아름다운 공원을 소개하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유길준은 도시의 웅장함과 화려함에서 문명사회의 경상을 보았다. ‘화려하고 아름답다’華美는 유길준이 자주 사용한, 서양문명을 형용하는 말이었다. 도시의 외관에만 주목한 것은 아니다. 비교적 관점에서 도시의 산업을 관찰하기도 했다. 런던은 천연자원을 수입해 가공·수출하고, 뉴욕은 천연자원과 공산품의 무역이 반반이며, 파리는 정미精美한 공예가 번창한 유행의 중심지라는 사실도 적고 있다. 유럽을 움직이는 상업 활동에 주목한 것이다.

또한 어두운 모습도 보았다. 세계의 부를 모아 발전한 가장 번성한 도시이면서도 미국과 달리 시내에 빈민들이 부자들과 뒤섞여 사는 런던의 모순된 풍경을 “세상에서 런던처럼 부유한 곳도 없고, 런던처럼 가난한 곳도 없다”고 서술하고 있다. ‘음탕한 소굴’을 이루고 ‘음풍’이 어디보다 성한 파리의 사창가, ‘청루靑樓가 즐비하고 매음하는 추태를 공공연히 자행’하는 함부르크의 홍등가도 눈여겨보았다. 문명의 빛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도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훗날 갑오개혁을 주도한 개화사상가 유길준1856~1914은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서 1년 반에 걸친 미국 유학을 채 끝내지 못하고 유럽을 거쳐 귀국길에 오른다. 더머 아카데미 Governor Dummer Academy에서 대학 입학을 준비하던 중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귀국 명령을 받은 것이다. 유길준은 1885년 6월경 미국을 떠나 아일랜드, 영국, 프랑스, 독일, 포르투갈, 이집트, 싱가포르, 홍콩, 요코하마 등을 거쳐 그 해 12월 귀국했다. 하지만 그는 도착하자마자 포도대장 한규설 대감의 자택과 별장에 감금돼 6년간 유폐 생활을 보낸다. 이때 유학 중 수집한 원고를 정리해 저술한 책이 바로 《서유견문》 20편이다. 1895년에 출판됐지만 1889년에 탈고했으니, 1880년대 청년 유길준의 고민과 견문과 꿈이 담긴 책이다. 서양 대도시의 소개는 마지막 두 편에 권말
부록처럼 실려 있다.













《서유견문》은 일본과 미국에서 보낸 두 차례의 유학과 여행에서 체험한 것과 관련 서적을 참조해 썼다. 《서유견문》은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1881~1882년 일본 유학때부터 구상한 오랜 기획의 산물이었다. ‘서유견문’은 서양여행기를 연상시키는 말이지만 실제 뜻은 그렇지 않다. ‘견문’은 과거 연행사절과 조선통신사의 귀국 보고서에 쓰인 ‘견문’見聞, ‘견문별단’見聞別單이란 말과 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의 초고를 고종에게 바쳤는데, 분명 귀국 사절이 견문록을 올리는 심정과 같았을 것이다.

‘노닌다’遊는 말은 어떤 장소에서 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배운다는 뜻이 담겨 있다. 유길준은 일본 유학을 “동東으로 유遊한다”고 표현했다. 유길준이 ‘동유’한 사절단 명칭에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라 하여 ‘견문’과 ‘유람’이 쓰였고, 수신사 김기수의 <일동기유>日東記遊에도 그 흔적이 있다. ‘서유’라는 말에도 노닐면서 서양문명을 배운다는 함의가 있을 터다. 유길준은 ‘동유’에서 메이지 일본의 문명개화가 서양 근대문명에서 비롯됐음을 알았고 훗날 ‘서유’로 이어졌다. ‘서유’는 서양문명의 ‘실경’을 알기 위한여정이었다.

《서유견문》은 세계관의 전환과 새로운 지식의 수용을 촉구한 계몽서다.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신장하고 국가의 주권이 확보하는 치밀한 논의를 전개한 정책론이다. 상업교역에 기초한 문명사회를 구상한 문명론이며 사회과학서다. 유길준은 인민이 생업에 기초해 자주적으로 생계를 영위하고 사회가 규칙과 법률에 의해 규율되고 정치가 공론에 의해 이루어지는 문명사회를 지향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입헌군주제를 옹호하고 군주의 ‘덕화’와 군주에 대한 충성을 얘기하면서 때때로 사회질서를 위한 오륜과 도리
의 덕목을 환기시켰다. 유길준의 문명사회 구상에는 유학적 윤리관과 질서관이 작용하고 있었다. 여기서 인민의 자립과 정치의 공공성을 중시하는 ‘미정’美政 개념을 제시한다. 백성에 대한 군주의 일방적 시혜를 뜻하는 기왕의 ‘인정’仁政은 ‘혜정’惠政이라면서 부정하면서도 그의 입헌군주제 구상에서는 유학적 군주관의 잔영이 감지된다. 유길준이 제시한 ‘미정’은 ‘인정’의 근대적 변용이었을 수도 있다.

상업을 중시하는 유길준의 문명사회론은 스코틀랜드 계몽사상과 맞닿아 있다. 《서유견문》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의 <서양사정>을 저본으로, 특히 《서양사정》 3개 편중 《서양사정 외편》을 토대로 저술됐다. 이 때문에 부당하게
유길준을 평가 절하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그냥 베껴 쓴 것이 아니다. 《서양사정 외편》은 후쿠자와가 존 힐 버튼John HillBurton (1809~1881)의 《정치경제론》1852 일부를 직역한 것이다.

버튼의 책은 에든버러를 중심으로 데이비드 흄, 토머스 리드Thomas Reid, 애덤 퍼거슨Adam Ferguson, 애덤 스미스 등이 만들
어낸 스코틀랜드 계몽사상을 총괄한 교과서였다. 후쿠자와는 버튼의 책을 ‘직역’했지만, 유길준은 《서양사정 외편》에서 필요한 대목을 취하고 자신의 생각을 넣어 ‘의역’ 혹은 번안했다.
유길준은 원전을 모른 채 후쿠자와의 번역문을 통해 의도하지않게 스코틀랜드 계몽사상에 접하게 된 것이다. ‘동유’에서 ‘서유’의 길을 찾았듯이 후쿠자와를 통해 스코틀랜드 계몽사상과 조우한 셈이다. 따라서 유길준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후쿠자와
보다는 스코틀랜드의 상업적 문명사회론을 봐야 한다. 스코틀랜드 계몽은 인민의 자유와 이성을 사회질서 속에서 파악하고
인민의 경제적 자립에서 성립하는 상업사회에서 문명화, 즉 진보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미개야만, 반개화, 개화문명의 단계설
이 여기서 나왔다. 질서와 덕목을 중시하는 스코틀랜드 정치 경제론도 유길준의 유학적 사유는 통했다.

유길준의 견문은 서양의 학교와 교육, 학문, 직업에까지 미치고 있다. 결혼, 장례, 예절 등의 풍속과 의식주도 면밀히 관
찰했다. 식사 예법에 관한 장황한 설명도 보인다. 빈원貧院, 고아원, 병원, 농아원, 맹아원 등 사회복지 시설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증기기관, 전신기, 화차, 화선과 같은 근대문명의 기기들도 상세히 소개했다. 이들 항목은 유길준이 본 문명사회
의 모습이지만, 유길준이 서양의 문명사회에서 찾아낸 이용후생의 정신과 마찬가지로 유학적 관심사가 투영된 것이기도 했
다. 특히 유길준은 서양사회의 많은 사례들에서 문명사회를 규율하는 법과 규칙에 주목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법과
규칙은 사회의 질서와 공공성을 확보하는 요체로서 유길준 문명사회론의 핵심이었다.

유길준은 화미함과 규율을 겸비한 서양 문명사회의 ‘완미完美한 경역’을 한국이 도달할 목표로 상정했다. 하지만 서양의 풍속까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풍속이 다른 나라에 비해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도 공평한 주장이 아니고, 다른 나라의 기풍이 우리나라에 비해 낫다고 말하는 것도 미친 자의 망령된 이야기다. 예절은 풍속의 습관에 따르는 것이므로 피차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고 말했다. 문화상대주의의 관점이다.

서양 사람들이 여자를 대접하는 예절을 서술할 때는 “듣는 자의 의향이 어떠하든지, 나는 내가 본 대로 쓸 뿐이며, 좋다거나 나쁘다는 비평은 내리지 않겠다”고 적고 있다. 비평을 자제하는 행위는 이질문화의 수용을 암시한다. 유길준은 주체적 개화를 주장했다. 문명국을 두려워하는 ‘개화의 노예’나 주견 없는 ‘개화의 병신’이 돼서는 안 되며, 장소와 시세에 맞는 ‘개화의 주인’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유길준은 서양문명을 서술하면서 ‘진경’과 ‘허영’, 즉 존재와 인식의 문제를 강하게 의식했다. 자신을 서투른 화공에 비유하면서 자신의 저술이 “서투른 화가가 자연의 뛰어난 진경을 그리는 데 삼매경에 빠져 신통한 아이디어도 없이 구태의 연하게 호리병박을 그린 것과 같다”고 토로했다. 유길준은 산수화의 묘사법에 빗대어 이렇게도 말한다. 화가가 묘사한 산은 ‘7할의 진경’밖에 형용하지 못한 산의 허영에 지나지 않지만, 그 허영은 산이라는 실재의 반영이므로 그 허영을 통해 산의 진경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비록 서양문명의 ‘허영’을 묘사했지만 이것을 통해 서양문명의 ‘진경’을 ‘유추’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필묵으로 형용할 수 없어 잠시 그만두는’ 것은 겸사일 따름이다. 유길준은 서양문명의 ‘7할의 진경’을 아주 꼼꼼하고 상세하게 ‘필묵으로 형용’했다.
한국의 개화,
문명사회의 도래를 꿈꾸면서….


- 글. 장인성. 서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