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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광복의 기쁨’을 ‘농악의 경연’과 함께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생기기 전에는 ‘농악경연대회’ 가 참 많았다. 광복 이후 서울 장안의 최대 볼거리는 ‘농악’ 이었다. 광복 후 국악원(당시 민속악이 중심이 된 민간단체 로, 훗날 ‘대한국악원’으로 이름을 바꿈)이 처음 연 큰 행사 가 ‘전국농악경연대회’로, 당시 시공관에서 열렸다. 그 무렵 농악은 최고의 흥행물이었으며, 지방에서 올라온 내로라 하는 농악단체들이 자웅을 겨뤘다. ‘전국민속예술농악대제 전’(1947년)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농악대들이 저마다의 기량을 뽐낸 최고의 축제였다. 1950년대에 해마다 열린 농 악대회는 창경궁(당시 ‘창경원’)과 덕수궁에 모인 상춘객들 에게 ‘농악’이란 볼거리를 통해서 삶의 에너지를 충전시켜 주는 최고의 페스티벌이었다.
이런 농악의 붐을 타고 새롭게 파생된 것이 있으니, 바 로 ‘여성농악’이다. 아름다운 여성을 중심으로 한 농악경연 은 지금으로 치면 ‘걸그룹’ 간의 배틀이라고나 할까? 이렇 게 충천하는 농악의 인기는 훗날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가 만들어질 수 있는 모태가 됐다.
명창 간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
‘명창명인대회’를 아는가? 동아일보사 주최로 1962년에 시 작됐다. 1970년대 중반부터 ‘명인명창’이라고 이름이 바뀌 었으나, 그전에는 ‘명창명인’이라고 했다. 동서를 가리지 않 고 음악의 기본은 ‘노래’다. ‘명창명인대회’에서는 당대 내 로라하는 판소리 명창이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김연수, 박녹주, 김여란, 김소희, 박초월 등이 출연해 서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실제 등수를 가리는 것은 아니더 라도, 명창 간의 심리전은 대단했다. 경서도창(京西道唱)에 서는 경기민요의 이진홍과 서도민요의 장학선이 라이벌이 됐고, 명인으로서는 거문고의 신쾌동과 가야금의 성금연이 늘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온습회’라는 이름의 ‘훈훈한’ 경쟁
세월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이전에는 어떠했을 까? 권번(券番)의 경쟁이 치열했다. 당시 경성에는 한성권 번, 대동권번, 한남권번, 조선권번이 있었다. 권번은 예술 교육기관으로서, 권번 내에서 서로의 경쟁이 치열했거니와 권번 간의 경쟁은 더 말해 뭣하랴. 자존심을 건 싸움이었 고, 결국 전통예술의 발전에 기여를 했다.
이런 가운데 권번은 저마다 특화된 장르를 강화해 나 갔다. 예를 들자면 조선권번이 경성좌창(京城坐唱, 지금의 ‘십이잡가’)에 출중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면, 한남권번 은 판소리를 특화시켰다. 권번은 봄·가을로 온습회(溫習 會)를 열었다. 권번에서 기예를 익힌 예기(藝妓)들이 가족 과 친지, 사계의 전문가들 앞에서 그동안 학습한 기량을 선 보이는 자리다. 온습회는 그 이름처럼 조금은 경쟁에서 벗 어난 듯 보였지만, 실제 이 온습회에서도 서로의 경쟁은 치 열했다. 이 온습회를 통해 누가 어떤 종목으로 어떤 권번의 대표가 되느냐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예회’에서 처음 실시된 현장 인기투표
요즘 텔레비전의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현장의 열기가 대단하다. 신인일지라도 이미 팬덤이 형성돼서 현장의 분 위기를 좌지우지한다. 그렇다면 조선 땅에서 이런 현장의 ‘인기투표’는 언제 처음 시작됐을까? 권번의 기생들이 경연 하는 ‘경예회’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경연대회’를 당시에는 경예회(競藝會)라고 했다. 각자의 예술적 기량을 겨루는 대회였다. 우리나라에 서 처음으로 현장 인기투표를 단행한 경예회에 관한 기사 가 보인다(1930. 11. 16. 동아일보).
조선의 4대 권번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출연해 가무 악(歌舞樂)을 겨루는 대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 다. ‘경예회’는 ‘미나도좌(座)’에서 열렸는데, 이 대극장은 1930년에 증축되었고, 종로5가(당시 종로 4정목)에 있었 다. 미나도좌는 광복 이후 제일극장과 평화극장으로 이름을 바꿔 가면서, 한일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막을 내린 극장 이다. 아리랑의 나운규가 ‘배우’로 출연한 연극이 상연되기 도 한 미나도좌는 당시 조선의 연극과 국악의 주요한 공연 장소였다.
팔도명창대회. 일제강점기 최고의 경연
경쟁은 필연적이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스포 츠보다 순위를 결정하기 어려운 예술 분야일수록 이런 경 연대회를 통해서 장르의 발전과 신인의 발굴에 더욱 박차 를 가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최고의 경연 대회는 무엇이었을까?
1930년 9월 22일 오후 9시 조선극장(인사동)에서 열 린 ‘팔도명창대회’로, 당시 경성방송국(JODK)에서 실시간 중계방송을 했다. 그 이름처럼 팔도에서 노래를 가장 잘하 는 사람들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지역과 권번, 개인의 이름 을 건 대결이었다. ‘팔도명창대회’는 이듬해인 1931년에도 9월 21일부터 사흘간 계속됐다.
그렇다면 첫 번째 ‘팔도명창대회’에는 누가 참가했을 까? 한성권번은 박부용, 한남권번은 박녹주를 대표로 내세 웠다. 박부용(1901~?)은 이후 신민요 ‘노들강변’을 통해 유성기 음반의 스타가 됐고, 박녹주(1905~1979)는 인간문 화재로서 판소리교육에 큰 역할을 했다. 전라도의 ‘광주권 번’, 경상도 대구의 ‘의성권번’, 함경도 원산의 ‘춘성권번’, 황해도의 ‘해주권번’ 등이 이 대회에서 자존심을 걸고 경연 을 펼쳤다. 점수가 집계되는 동안에는 당대 최고 판소리 명 창의 축하공연이 이어졌다.
장학선, 경연대회 최고 스타
과연 제1회 ‘팔도명창대회’에서는 누가 최고의 영예인 ‘1 등’을 차지했을까? 평양 ‘기성권번’의 장학선이 영광의 주 인공이었다. 요즘 서도소리를 하는 명창들은 무형문화재 제도 하에서 김정연과 오복녀에게 수학했으나, 실제 일제 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서도소리의 최고 스타는 장학선 (1905~1970)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나는 가끔씩 장학선 의 소리를 듣는데, 이렇게 서도소리를 하는 이가 요즘 없어 서 무척 아쉽다. 1969년 9월 27일, 장학선은 서도소리의 국 가지정 무형문화재(당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 으나 안타깝게도 이듬해 연탄가스 중독으로 타계했다. 공 정한 경쟁을 통해 한 시대 최고의 명창으로 인정받은 사람 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것이다.

경연대회가 좋은 이유
경쟁은 필연적이다. 경쟁이 좋은 것은 ‘경연대회’를 통해 자신의 장점과 한계를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적 기량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 스포츠의 올림픽이 그 런 것처럼 말이다. 지난해 새롭게 생긴 국악경연이 있다. 제1회 ‘가람 전국국악경연대회’는 어떤 잡음도 없이 공정 하게 심사를 치른 대회였다. 이런 경연대회가 국악계에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 속에서, 국 악이 더욱더 활짝 꽃피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일제강점기, 그 어렵고 버거운 삶 속에서도 조선악(朝鮮樂)을 통해서 꿈을 키운 그녀들의 성공담이 우리 시대에도 계속 이어지 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