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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 한국 독립운동의 기억과 유산을 조명하다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06-05 조회수 : 4732

 
독립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나?
 
근대시기 우리 민족은 자주독립의 꿈과 국민국가 건설의 이상을 품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외세의 침탈로부터 주권을 지키고, 나아가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자주독립의 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민족운동이 독립운동인 것이다.개항 이후 지속적으로 침탈을 감행하던 일제는 1894년7월 갑오변란을 일으켰다. 이른바 ‘내정개혁’을 압박하다가경복궁에 침입하여 무력으로 우리 정부를 무너뜨리는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그해 8월 처음으로 청풍유생 서상철이 유림의 본고장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같은 해 9월에는 평안도 유생 김원교가 상원에서 ‘평안도 창의사’라는이름으로 의병을 모아 싸웠다. 의병에는 양반·유생만 참여한것이 아니다. 김원교 의병에는 유생과 더불어 동학농민이나포수들이 참여하였다. 전주화약(全州和約) 이후 은인자중하며 전라도를 중심으로 집강소를 세워 폐정개혁에 집중하던동학농민군도 갑오변란 직후 재봉기를 준비하였다. 전봉준공초에도 잘 드러나 있듯이 동학농민군이 다시 봉기한 이유는 갑오변란으로 상징되는 일제의 주권 침탈이었다. 이로부터 시작된 의병운동은 이듬해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비극적 대사건을 계기로 더욱 증폭되었다.주목되는 것은 독립운동이 의병이나 동학농민군 재봉기와 같은 무장투쟁으로 시작된 점이다. 독립운동을 관통하는 무장투쟁의 전통이 바로 여기서 발원하는 것이다. 독립운동의 주체도 지배계층인 양반·유생뿐만 아니라 농민군으로 대표되는 피지배 민중이 대거 참여하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의병 봉기로 시작된 독립운동의 파고는 점점 높아졌다. 1905년 을사늑약은 전 민족적 독립운동의 실질적 발화점이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 야욕을 꺾지 못하고,결국 경술국치를 당하고 말았다. 경술국치 이후 1910년대독립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 아래 주로 비밀결사의형태로 나타났다. 의병 진영에서는 주력부대가 만주와 연해주로 옮겨간 뒤에도 미(未)해산 의병부대가 태백산과 소백산 등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산발적이지만 3·1운동 직전까지 지속적으로 항전하였다. 이로써 의병은 3·1운동으로 계승되면서 시위운동을 한층 격렬하게 발전시킨 원동력이 된 것이다. 계몽운동 진영에서도 사립학교를 중심으
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가장 1910년대를 대표하는 독립운동단체로는 광복회를 꼽을 수 있다. 광복회는 의병과계몽운동 계열이 합류하여 결성한 혁명적 독립운동단체이다. 한말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으로 분류하였던 국권회복운동이 일제 식민지 지배라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서로 방략과 이념을 주고받으며 발전적으로 합류한 것이다. 광복회회원들은 중국의 신해혁명을 경험하면서 정치적 세계관으로 공화주의를 확립하고, 독립군 양성을 통한 독립전쟁을지향하면서 군자금 모금과 친일파 처단 등 혁명적 활동을벌였다. 결국 1919년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항일독립운동으로 전개된 3·1운동은 이러한 1910년대 독립운동 역량이 총결집하여 봉기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립,만주 독립군단의 결성, 국내 비밀결사의 속출 등 수많은 독립운동 조직도 1910년대 독립운동의 기반 위에서 성립하였다.   
 
   1920년대 국내 독립운동은 민족총력항쟁으로 전개되었다. 3·1운동을 통해 급격히 성장한 민족역량이 바로 그 원동력이다. 3·1운동 이후 1920년 사이에 국내에서 조직 된 비밀결사만도 100개가 넘었으며, 전국 각처에 연통부와 교통국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이 생겨났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도 100여 개의 독립군 단체와 2만여 명의 독립군이 독립전쟁에 참여하였다. 이런 기반 위에서 독립 전쟁사에서 길이 빛나는 1920년의 봉오동·청산리대첩이 가능했던 것이다.
   1920년대는 독립운동 이념과 지도 노선도 다양하게 추구되었다. 3·1운동을 거치면서 복벽(復辟)주의가 극복되고 공화주의가 정착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종결과정에서 제국주의의 반인류적 과오를 반성하며 사회진화론대신에 인도주의가 부상하였다. 인도주의는 급속히 부각되면서 3·1운동의 이념으로 집약되었고, 이어 민족운동의논리로 확산되었다. 사회주의와 아나키즘도 민족사회에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1920년대 독립운동계의 지향은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으로 모아졌다.
   특히 1927년 2월 국내에서 성립한 신간회는 민족통일전선운동의 결실이다. 신간회는 1920년대 전반기부터 꾸준히 추구된 민족통일전선운동의 바탕 위에서 비타협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협동하여 결성한 조직으로가장 1920년대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신간회는농민운동·노동운동·학생운동 등을 지도하면서 국내 민족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 토대 위에서 1929년 원산총파업과 용천소작쟁의 등 대중운동과 전국 규모의 광주학생 독립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1930년대 국내 독립운동은 세계대공황으로 일제의 군국파쇼체제가 강화되는 상황 속에서 전개되었다. 1931년신간회 해체 이후 국내 독립운동은 학생운동과 노동자 농민 등 대중운동 중심으로 변화하여 갔다. 농민층 몰락을 배경으로 고양된 대중운동은 혁명적 농민조합운동과 노동조합운동으로 전개되면서 식민지체제의 타파를 지향하는 정치투쟁으로 발전하였다.
1940년대 전반은 일제의 극악한 탄압에 의해 민족적인 것이 철저하게 차단되고 봉쇄당하던 암담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면서 독립에 대한 희망을가진 시기이기도 하다. 조선건국동맹은 1944년 8월 일제의패망을 예견하며 여운형이 주도하여 국내에서 결성한 비밀결사 형태의 조직이다. 조선건국동맹은 조직망을 전국으로확대해 가면서 충칭(중경)의 임시정부와 연안의 조선독립 동맹과 연결을 도모하였다.



 
독립운동의 유산은 무엇인가?
 
반세기에 걸친 독립운동의 유산은 무엇인가. 독립운동을 통해 우리 민족이 봉건 백성에서 근대 국민으로 우뚝 섰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가시밭길 독립운동을 통해 봉건주의를 탈각하면서 근대화의 길을 걸었다.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을 통해 다양한 가치와 이념을 수용함으로써 민주시민으로 발전하였다. 민주시민의 가장 큰 덕목은 자신의 가치와 신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그것도 존중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민주정치의 기본이다. 다름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한 토대 위에서 소통을 통해 최대공약수인 ‘민의’를결집해 대의정치를 구현하는 것이다.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우리 민족은 백가쟁명식의 가치 편력을 거쳤다. 자유주의(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아나키즘과 삼균주의 등의 세계관은 물론 무장투쟁론과 외교론과 준비론과 문화운동론 등다양한 운동노선을 경험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립과 갈등도 겪었지만, ‘대동단결’을 지향하며 통합과 연대를 이루었던 역사적 경험도 쌓았다. 이는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원천이자 연원이 되었다.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다양한 사회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이는 대단히 귀중한 경험이자 성과이다.한말 계몽운동 조직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 다양한 이념의독립운동 조직과 각계각층의 사회단체를 만들었던 것이다.처음 구성원의 권익투쟁에서 시작한 각종 사회단체의 사회운동은 점차 식민지 현실을 자각하면서 정치운동, 즉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청년학생과 농민과 노동자 등민족대중이 독립운동에 동참한 요인이고, 민족대중의 일상 투쟁이 곧 바로 독립운동이 된 이유이다. 독립운동의 유산은 대한민국 헌법에 온전히 반영되어 있다. 1987년 10월27일 제9차 개정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밝혀 놓았다. 3·1운동의 백미는 우리 민족 스스로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독립을 ‘청원’하지도, 국제열강에 ‘구걸’하지도 않았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함으로써, 스스로 독립국가와 자주국민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국가와 정부를 세웠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이고, ‘임시정부’였다. 왜 ‘대한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 했을까. 대한제국을 계승하고 있지만, 황제가 주권을 오로지 하는 전제군주국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주권을 갖는 민주공화국으로 세웠기 때문이다.
 
   하나 더 든다면,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을 통해 역동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독립운동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일’이다. 모든 것이 낯설고 험난한 시절이지만, 우리 민족은 독립의 꿈과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각계각층의 민족대중이 다양한 사상과 이념을수용하고, 독립운동 지도기관을 만들고, 각종 사회단체를결성하여 광복의 날을 열었다. 온 겨레가 역동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성과이자 결실이다.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은 그런 독립운동의 유산 위에서 빛나고 있다.


- 글/사진 : 김용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문화재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