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지네각시 이야기 속
부부 관계와 풍요로움
글. 홍나래(성공회대학교 신학연구원 연구교수)
<지네각시>는 이물교혼(異物交婚) 이야기인데, 주인공인 인간 남자가 기혼자인 데다가 지네인 각시는 본 모습과 승천하려는 소망을 숨기고 있어서 이들의 우연한 결합은 다양한 결말을 이끌게 된다. 이야기는 가난으로 가족을 부양하지 못해 괴로워한 남자가 자살을 시도하며 시작되고, 지네와 구렁이는 오랫동안 승천을 다투고 있다. 한 편의 환상적인 이야기 속에 신화적 투쟁부터 죽을 만큼 괴로운 가족과 부부의 고민 그리고 부와 가난에 대한 문제까지 다채롭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일러스트: 심은경
<지네각시> 이야기란?
<지네각시>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옛이야기이다.
요즘에는 어렸을 때 동화책으로 읽는 정도지만, 1980년대에 전국에서 옛이야기와 민요들을 조사하여 엮은 82권의 『한국구비문학대계』에는 60편 이상이 채록될 정도로 전승력 있는 이야기였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편찬한 『한국민속문학사전』에서는 이 이야기를 <지네와 구렁이의 승천 다툼>이라고 이름 붙였으나, 여러 이본(異本, 기본적인 내용은 같으면서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는 작품)들에서 이런 삽화가 탈락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다른 승천 다툼 이야기들과는 지향하는 의미가 조금 다르기에 보통 <지네각시>라고 부른다.
<지네각시>는 잔혹한 현실을 그려 내며 시작한다. 너무 가난해 가족들을 내내 굶기고 옷도 제대로 못 입힌 남자는 새해를 앞두고 자식들에게 밥 한 그릇도 줄 처지가 못 되자 산에 올라가 목을 매달아 죽으려고 결심한다. 산 중턱에서 죽으려고 하는 데, 한 여인이 등불을 들고 나타나 죽지 말라고 말리더니 남자의 사정을 듣고는 자신을 따라가면 남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까지 모두 돌봐주겠다 한다. 가족으로서 또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을 포기한 시점에서 남자는 여인을 구원으로 여겨 그녀를 따라 산속 기와집으로 들어간다.
행상, 『단원풍속화첩』 | 김홍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아이를 등에 업고 행상에 나서는 가난한 가족의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작품이다.
새로운 삶에 따른 불안과 의심, 신뢰와 감사의 마음으로 마주하다
남자는 마을과 자신의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속에서 여인과 풍족하게 살게 된다. 여인은 남자에게 본가를 염려하지 말라고 했지만 남자는 편안한 삶을 영위하게 되자 다시 가족을 걱정하고 그리워하게 된다. 남자는 여인과 살면서 일 년에 두 번 섣달그믐날과 추석 전날 본가에 다녀올 수 있다고 약속했는데, 어떤 이야기에서는 아버지의 기일을 맞아 본가에 가 제사를 지내고자 했다. 새롭게 삶의 기운을 회복한 남자에게는 현실 사회로 복귀하려는 의지도 되살아난 듯했다. 남자가 본가에 가 보았더니 가족들이 부자가 되어 넉넉하게 살면서 도리어 가출했었던 자신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여인이 남자의 이름으로 챙겨 준 덕분이었다. 이웃들과 가족에게 인정받은 남자는 여인에게 더욱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남자가 산속 여인의 집으로 다시 오는 길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나 여인에게 가면 죽는다면서 극구 말렸다. 남자는 아버지 말을 따르자니 여인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고, 거역하자니 불효라서 고민되었으나 그래도 가 봐야겠다고 했고, 아버지는 만약 간다면 여인이 사실 지네이니 몰래 확인한 후 담배를 물고 침을 모아 뱉어서 퇴치하라고 알려 주었다.
남자는 조용히 집으로 들어가 방을 살펴보았는데, 과연 거대하고 벌건 지네가 누워 있었다. 남자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차피 여인이 살려 준 목숨이고 자신과 가족들에게 이만큼 은혜를 베풀어 주었으니 그 손에 죽어도 원통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후, 인기척을 내며 들어갔다.
지네는 얼른 여인으로 변신해 남자를 맞았는데, 남자는 방에 앉아 담배만 피웠고 여인은 구석에 앉아 초조하게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한참 담배를 피우다가 문을 열고 바깥에 침을 탁 뱉었다. 그랬더니 여인이 남자의 손을 잡으며 오다가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느냐면서, 사실 그 아버지는 자기랑 살던 구렁이인데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려던 것이라고 했다. 남자는 여인이 지네가 되어 자신을 죽일 수도 있지만 그간의 은혜를 생각해 도리를 다하려고 했고, 여인은 남자가 자신을 해칠 수 있음에도 남편으로 삼은 그를 지켜본 것이다.
그 구렁이가 침을 뱉으라구 해서 당신이 내게다 침을 뱉었으면 나는 죽어. 그랬을 텐디.
에, 서방 님이 다른 디다 뱉구 나를 살려 줬기 때미 나는 인제 인도환생해서 천당으루 올라갈 테니, …자알 백년행복허구 잘 살으라.
- <정직한 사람과 변신한 지네>, 『한국구비문학대계』, 1982년 이명순 구연
담배 썰기, 『단원풍속화첩』 | 김홍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연초라고도 하는 담배는 광해군 때 일본을 거쳐 들어왔거나 중국을 통해 들어왔을 것이라 한다.
구렁이는 지네와 적대적이었지만 남자 앞에 나타났을 때에는 돌아가신 아버지나 할아버지처럼 친근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로 등장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지네인 여인에 비한다면 인간의 모습이었으니 생명을 건 남자의 고민은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아버지를 거부하고 조용히 자신의 삶과 내면을 돌아보며 윤리적인 결단을 내렸다. 이는 타인의 기준에 집착하지 않고 인간의 도리에 대해 자신이 진정 원하는 바이자 지향하는 바를 찾은 것이다. 처음 그는 경제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여인에게 의존적인 인물이었으나 이제 그는 스스로 판단하고 상대를 이해하며 감쌀 수 있는 인물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의 행동은 상대방인 지네 각시의 오래된 소망을 실현시켜 줄 만큼 힘이 있었다. 지네각시는 신성한 존재가 되어 승천했고 남자는 가족에게 돌아가 잘살게 되는데, 어떤 경우에는 지네 각시가 완전한 인간이 되어 남자와 해로했다고도 전한다.
지네각시, 풍요로움과 회복
지네는 다리가 많은 절지동물인데 생긴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혐오할 뿐만 아니라, 독이 있어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은혜를 갚은 두꺼비>로, <지네 장터>라고도 불리는 이야기이다. 어린 소녀를 제물로 받던 지네와 소녀가 키우던 두꺼비가 서로 독을 뿜으며 맹렬히 싸우다 죽는데, 여기에서 지네는 악신이지만 마을에서 모실 정도의 신비한 존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네가 항상 악이나 부정적인 역할만 맡는 것은 아니다. 독이 있는 지네이기에 한약재(오공 蜈蚣)로 활용되어 병든 사람들을 구하기도 하고, 지네각시처럼 죽으려는 남자를 구해 주고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는 등 풍요롭고 긍정적인 신성을 발휘하기도 한다. 견훤(후백제의 시조)이 천상에서 귀양 온 지네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지네 명당에 터를 잡아 자손이 지네 다리처럼 번성하고 재물을 많이 모았다는 이야기들도 있다. 건축물의 틈새를 잡아 주는 지네철은 기능적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작품이 되기도 하고, 지네 장식을 가구에 문양으로 넣어 다산을 기원하기도 했다. 곧 문화 속에서 지네는 재물과 복을 가져다주는 존재이면서도 혐오스럽고 두려운 양가적 의미를 지니는데, <지네각시> 이야기에서도 이러한 이미지는 중첩된다.
(좌) 약재로 쓸 말린 지네(오공)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우) 지네철, 헌인릉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지네철은 서로 맞댄 박공널의 틈새가 벌어지는 것을 잡아 주는 지네 모양의 철물이다.
동물이 인간과 혼인할 수 있는 세상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생명과 생기를 얻으며 세상과 인간을 통합적으로 인식한 신화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 지네각시에서는 가난에 절망해 죽음의 위기에 몰린 남자가 자신에게 베푸는 여인을 따라간 후 때로 그녀의 권유로 매일 돈을 쓰거나 적선하며 지내게 된다. 지네각시의 행동은 활인(活人, 사람의 목숨을 구해 살림)의 덕(德)으로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라고도 하지만, 베풀고 증여하는 행위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공동체에 활기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야기 향유층의 사고를 반영한 것이다.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한 남자는 변화했고 성장했으며 이는 곧 여인의 변화와 성장으로 이어졌다. 가난했던 그는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은혜로운 감동 속에서 희생까지도 결단할 윤리적 성장도 경험했다.
1980년대에 <지네각시> 설화를 구연한 60~70대들은 자식에게 제대로 밥을 못 먹이는 주인공의 처지와 절망에 강하게 연민을 느끼고 공감했다는 연구도 있다. 적게는 한 사람, 나아가 한 가정과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만큼 공동체가 회복되고 활기차질 거라는 희망을 민담의 낭만 속에서 그려볼 수 있다면, 이것 또한 이야기의 힘일 것이다.
시대의 변화와 부부의 문제만큼이나 많은 이본들
기지시줄다리기(재앙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 의식)에 관한 유래담에는 지네와 구렁이가 치열하게 싸우다 죽은 장소에 동제를 지내 풍년을 기원한다는 것과 기지시의 지형이 지네 형상이라 다리를 잡아당겨 지네가 힘을 못 쓰게 해야 한다는 설도 전해진다. 줄다리기는 신들의 결합을 상징하는 의례로서 여자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한다. 지네와 구렁이의 다툼을 농경 사회의 풍요 의례에서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지네각시> 화소의 연원은 오래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승되면서 <지네각시> 이야기는 경제적 무능과 고립, 담배를 활용한 지네 퇴치 방법 등 시대의 문제의식과 변화된 문물을 반영하며 풍성해졌다.
지네를 퇴치하는 방법으로는 담뱃진을 뱉는 경우가 많지만, 구연자들에 따라 밥을 뱉으라거나 침을 세 번 뱉으라는 방법도 제시된다. 이때 밥이나 침을 뱉는 것은 상대를 처치하려는 주술적이고 상징적인 행위이다. 조선 후기 담배가 유입된 후 민간에서 담뱃진을 발라 지네를 퇴치했다고도 하는데, 실질적인 방법이 이야기의 변이를 유도한 예로 보인다.
이야기 세계에서 신성한 동물과의 혼인은 비범한 능력을 지닌 영웅을 탄생시키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지네각시> 이야기에서 여인은 출산하지 않고 만약 자녀를 낳았다고 해도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만큼 이야기는 지네인 여인과 가난한 인간 남자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으며, 이들의 처지와 관계를 둘러싼 미묘한 질문을 전승자들마다 이야기 속에 담아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네각시> 이야기는 앞서 소개한 전형 외에도 지네가 구렁이와 싸울 때 남자에게 돕도록 요청한다거나, 소수이지만 남자가 금기를 어겨 정체가 폭로된 여인이 떠나 버리는 비극도 있고, 승천한 여인을 그리워하다 결국 남자도 승천해 선관(仙官)이 되기까지 한다. <지네각시>는 말로 전승된 특성상 다양한 변이를 보이지만, 작품을 과거에서 현재로 또 개인작에서 공동작으로 연결하며 구연자들의 목소리를 상상해 보면 입체적으로 구성되는 즐거움이 있다.
기지시줄다리기
출처: 당진군청
줄다리기는 농경 문화와 관련을 맺고 있다.
기지시의 줄다리기 유래에는 지네와 구렁이의 싸움 이야기도 전해진다.











